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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왕 - 피터 잭슨 (Peter Jackson)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12. 15. 19:14
연재 - 뉴질랜드의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

판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으로 ‘영화의 제왕’ 되다
2백년이 채 안 되는 짧은 뉴질랜드 역사(와이탕이조약 체결 기준). 그 역사의 큰 줄기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부터 사업가, 예술인, 스포츠 스타 등 뉴질랜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사람들을 연재한다. 이번 호에서는 ‘반지의 제왕’, ‘킹콩’을 제작한 영화감독 피터 잭슨(Peter Jackson)을 소개한다.

다섯 살 어린아이와 70세 노인의 말을 유심히 들어 봐라. 그들의 말은 아주 엉뚱하거나 흘려 듣기에는 너무 귀중한 것들이 많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가지고는 결코 튀거나(?) 성공할 수 없다. ‘뉴질랜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영화감독 피터 잭슨(Peter Jackson)이 그런 사람이다. ‘엉뚱함’을 ‘진지함’으로 바꾼 사람으로 말이다.

존 로널드 톨킨(J, R Tolkien)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전 3권)시리즈를 영화화 해 전세계 영화계를 뒤흔들어 놓은 피터 잭슨은 고국 뉴질랜드에선 ‘컬트영화의 거장’, 미국 할리우드에선 ‘블록버스트의 제왕’으로 불린다.

‘판타지 영화계의 신’이라는 극존칭도 따라 붙는다.

◁ 존 로널드 톨킨(J, R Tolkien)


‘컬트 영화의 제왕’ 할로윈데이에 태어나
피터 잭슨은 1961년 10월 31일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 인근의 푸케루아 베이에서 태어났다. 훗날 ‘컬트영화의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려고 했는지 공교롭게도 할로윈데이에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아홉 살의 어느 날, 피터 잭슨은 텔레비전에서 상영된 영화 ‘킹콩’을 보았다. 1933년 만들어진 ‘킹콩’은 그 나이 또래의 어린아이들에게는 ‘환상’ 그 자체였다. 킹콩과 한 여인의 애틋한 사랑의 감정보다는 괴수 같은 킹콩을 만들어낸 영화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 날 피터 잭슨은 부모님이 사준 8mm 비디오 카메라를 받아 들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꿨다. ‘아홉 살 인생’의 한 날이 30년 후 세계 영화계의 판도를 뒤집어 놓은 순간이었다.

피터 잭슨의 데뷔 영화는 1987년에 제작된 ‘Bad Taste’(고무 인간의 최후)였다. 이 영화는 4년간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피터 잭슨의 고향에서 상영됐다. 일종의 동네시사회였다고 보면 된다. 돈이 없어 동네친구들을 배우로 끌어 들여 어렵사리 만든, 이 영화는 적은 자본과 갖가지 특수효과 등으로 웰링턴 지역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피터 잭슨이 감독, 배우, 각본, 의상, 특수 효과 등 거의 전 부문을 맡은 쉽게 말해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며’ 만든 작품이었다. (네이버 영화정보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8646 )

이 영화에서 피터 잭슨은 23번이나 죽는 연기를 했는데, 뒷날 이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영화계로 알려져 마침내 칸느 영화제에 초대를 받게 됐다. 정통영화의 틀을 벗어나 신선한(?) 모습으로 선보인 이 영화는 10여개 국가에 수출되면서, 영화애호가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컬트 영화의 클래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첫 영화 ‘고무 인간의 최후’
영화 ‘Bad Taste’(고무 인간의 최후)의 성공으로 피터 잭슨은 본격적인 영화감독으로 나서게 된다. 돈 벌이를 위해 그동안 짬짬이 해오던 텔레비전 방송국 연출일과 신문사 사진기자일을 과감히 때려치우고 스크린 세계로 달려든 것이다. 몇 편의 공포영화를 더 만들면서 기량을 맘껏 뽐낸 피터 잭슨은 드디어 전세계 영화팬들의 환호성을 자아낸 ‘반지의 제왕’을 감독하게 된다.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을 만들기 전 나름대로 원칙을 하나 갖고 있었다.
아무리 할리우드의 입김이 세다고 하더라도 영화예술인으로서 결코 ‘기죽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할리우드가 자기를 오라고 명령(?)을 내릴 것이 아니라 장래 세계적인 감독이 될 자신을 잘 알아모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때가 왔다. 할리우드에서 그를 알현(지체높은 사람을 찾아뵘)하게 만들어 냈다. 피터 잭슨은 이 영화에서 10여개가 넘는 아카데미상을 받게 해줌으로써 당당하게 말발과 끝발을 입증해 주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영화계에 독특한 기록을 남겨준 작품이다. 피터 잭슨은
‘The Fellowship of the Ring’(반지 원정대),
‘The Two Towers’(두 개의 탑),
‘The Return of the King’(왕의 귀환)
이 세편의 작품을 동시에 찍고도 영화팬의 애간장을 태우려고 했는지 2년의 시차를 두고 스크린의 막을 열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기다린 만큼 영화의 질은 극찬을 받았으며 그 흥분 역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데, 영화평론가는 ‘반지의 제왕’을 만든 피터 잭슨에게 올리버 스톤과 스티븐 스필버그에 버금가는 영화계의 천재라는 월계관을 씌워 주었다.

어릴 적 꿈 ‘킹콩’ 다시 만들어

꿈은 이루어진다.’
피터 잭슨이 아홉 살 때 꾼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언젠가 ‘킹콩’을 다시 한 번 멋지게 만들어보겠다는 어릴 적 꿈을 마침내 실현해 낸 것이다. 3시간이 넘는 대작 ‘킹콩’을 훌륭하게 재연해 낸 피터 잭슨은 ‘그가 만들면 영화의 또다른 전설이 된다’는 말을 남겨 놓을 정도로 영화계의 제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피터 잭슨이 비록 세계적인 영화계의 거물로 자리잡았지만 뉴질랜드 사람들은, 특히 고향사람들은 그를 아직도 ‘영원한 철부지 영화쟁이’로 기억하고 있다. 영화 만들 돈이 없어 갖가지 소품과 특수효과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대책없는(?) 천재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웰링턴의 매서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늘 반바지 차림으로 메가폰을 잡은 배불뚝이(영화 킹콩을 만들면서 30kg 이상 살을 빼기는 했지만) 영화감독으로 말이다.

‘반지의 제왕’을 찍기 전 헬리콥터 타고 뉴질랜드 전국을 돌면서 마침내 정말 ‘그림같은’ 촬영장소를 기가 막히게 골라낸 피터 잭슨의 ‘뉴질랜드 사랑’은, 모국을 빛낸 영화감독의 애국심을 전세계에 보여 주었다. ( nz4korea의 반지의제왕 촬영장 호빗마을투어 참조  http://nz4korea.com/163 ) 피터 잭슨은 웰링턴에 영화사를 설립하고 스튜디오를 직접 만드는 등 뉴질랜드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그가 가진 명성을 최대한 활용, 영화계의 든든한 정신적 맏형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반지의 제왕’, ‘킹콩’의 영광에 이어 피터 잭슨은 또다른 영화의 신화를 재현해 내기 위해 곧 메가폰을 잡을 예정이다. 나오미 노빅의 판타지 소설 ‘테메메르’(Temeraire)가 바로 차기 작품이다. 나폴레옹이 승승장구하며 유럽전역을 휩쓸던 19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을 피터 잭슨은 어떤 연출로 세계 영화팬들의 이목을 또다시 집중시킬 수 있을런지 벌써부터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피터 잭슨을 보면 ‘자유인’의 참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자유분방하게 살면서도 독특한 예술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예술이 주는, 영화가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삶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을 뉴질랜드가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홉 살 인생’이란 책이 있다. 아홉 살에도 인생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의, 짧지만 의미는 아주 넓은 위기철의 철학소설이다. ‘엉뚱한 꿈을 꿀 수 있는 아홉 살 인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즐거운 일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혹시 내가 그 때 꾼, 아니 오늘의 우리 자녀들이 꾸고 있을 지도 모를, ‘괴상한 꿈’이 언젠가 우리도 모르게 현실로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조금은 헛된 망상(?)을 한다면 사는 게 조금은 더 ‘영화같지’ 않을런지…

출처 : 뉴질랜드 기독교신문 크리스천라이프 www.christianlife.co.nz
편집 / 사진 자료 정리 : nz4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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